소설/일반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아버지에게서 아버지에게로.

달달콤이 2022. 10. 27. 16:20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서점에 나왔을 때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습니다. 유시민이 기차에서 읽다가 너무 웃었다고 하기에 얼마나 유머러스한가 궁금하기도 했고, 책 뒤표지에는 눈물이 솟아난다고 해서 또 궁금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눈물과 웃음이라니. 한 사람의 인생을 그보다 더 잘 담을 수가 있을까요.

대놓고 울었다고 하기에 나는 읽으면서 울지 말아야지 생각하긴 했습니다.

사회주의자. 빨치산. 빨갱이였던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7쪽

이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이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이르다고도 할 수 없는, 어쩌면 주변에서 한번쯤은 만났을 법한 평범한 장례식이 시작될 참이지요. 그런데 이 아버지에게는 특이한 이력이 있습니다. 그는 빨치산이었으니까요. 평생 그 이름에 묶여 살았지만 단 한 번도 배신을 생각하지 않았던 혁명가가 바로 '나'의 아버지입니다. 진지하고 또 진지하게 살아왔던 아버지가 만우절 장난처럼 떠난 날. 황망함에도 침착하게 장례를 치르던 '나'의 앞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아버지'였죠.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44쪽

사회주의자들은 패배했고, 그래서 대부분의 동지들이 소멸했습니다. 한때 역사의 진보를 꿈꾸며 죽음을 각오했던 아버지가 평생 '민중'이 '오죽하면'그러겠느냐는 소리를 달고 살았던 것은 그 역시 '오죽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유물론자이자 사회주의자로서 가족. 친지를 등진 적이 있던 그의 마음이 '오죽'했기 때문에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의 '머슴'을 자처하며 식구들의 비난을 그저 감내했는지도요. 

떼어버리고 싶었지만 잃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등에서 내려오지 않던 어린 딸 '나'는 세월이 흐르며 점점 아버지로부터 멀어져갑니다. 당시의 사회는 빨치산의 딸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런 그녀의 상실감과 허탈함에 대해 아버지는 사과하지 않았으니까요. 

"저 질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
아, 작은아버지도 나처럼 이 길을 따라 떠나고 싶었구나. 떠나려고 이 길을 걸어와봤구나.

거추장스러운 '누구의 딸'에서 벗어나고자 길을 걷기 시작한 '나'에게 그녀보다 먼저 그 길을 걸었던 작은아버지는 '끝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한 질긴 인연이 가족인 것이고, 그럼에도 잃어지지가 않는 것이 아버지겠지요. 아버지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이와 술잔을 기울이기도, 평생 교련을 가르치던 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역사의 부역자들이라 불리는 저 반대편에 선 자들의 친구이기도 했으니까요. 심지어 아버지는 베트남소녀의 담배친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이자 '나'의 아버지. 동시에 빨치산이자 동네사람들의 마음의 위안처이기도 한 것이죠. 

이 둘이 어떻게 하나일 수 있을까요. 죽음이 오가고, 평생의 원한이 오가는 대화를 하다가 살짝 돌아앉기만 하면 언제 눈에 붉은 기가 돌았냐는 듯 자식 이야기, 농사 이야기같은 사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원수이면서 동시에 은인일 수가. 무덤에 침을 뱉고 돌아섰다가 다시 와서는 소주잔을 기울일 수가 있는 걸까요. 

'나'의 아버지 말을 빌리자면, '사람'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게 참 다행이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죠.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세상의 전부였던 아버지에게서 멀어지고, 벗어나고자 애를 쓰고, 다시 화해하게 됩니다.

책에 나온 역사적 사건

'나'의 아버지의 삶은 격동기 우리나라의 역사와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사건들이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데요. 몇 가지 알고 읽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남부군 : 6.25 전쟁 직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좌익 빨치산 부대. (소설에서는 '나'의 어머니가 지리산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나옵니다. 1990년에는 이 남부군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했는데요. 그동안 빨치산 이야기가 금기시되어 왔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죠.)

여순사건 : 1948년 전남 여수.순천 지역에서 국방경비대 제 14연대 소속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키고 이에 좌익 계열 시민들이 호응해 봉기했다가 유혈 진압된 사건. (수배중이던 아버지가 이 14연대를 이끌고 반내골에 왔던 것으로 서술되어 있어요.)

가톨릭 농민회 : 농촌공동체 조성 및 친환경 농업기술 개발 등을 목표로 설립된 단체. 각 지역에 있었으며 농민 운동을 이끌거나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